이레: 선생님이 강의랑 연구를 주로 하시지만, 창작활동도 하고 계시잖아요. 감사하게도 직접 쓰신 소설 두 편을 알려주셔서 저희가 다같이 읽어볼 수 있었어요. 이번에는 선생님이 쓰신 두 소설 <올림픽공원 산책지침>과 <엔딩의 발견>에 대해 얘기 나눠보면 어떨까 합니다. 모두 날씨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 소설들이었어요. 추위와 더위, 온도와 불빛 같은 것들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평소에 날씨를 섬세하게 감각하시는 편인지 궁금했어요.
지원: 뭔가 날씨를 기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너무 변하니까. 저는 날씨에 엄청 영향을 많이 받긴 해요. 그리고 날씨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 다음에는 매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상하지 않나 이거???’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걸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요. 그리고 환경에 관련된 소설이 꼭 모두가 멸망한 미래에서 사막을 혼자 떠도는 그런 얘기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있었던 6월의 예쁜 비라던가, 이런 날씨와 일상적 행복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야독: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 같아요.
지원: 맞아요. 사실 공포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사람이 지킬 게 있어야 세지잖아요.
야독: 저희가 전에 얘기했던 게 노스탤지어가 환경 운동의 주요 감정이 되면 어떻겠는가? 라는 거였어요. 그것도 일종의 좋아했던 것, 사랑했던 것에 대한 기억이잖아요. 그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지원: 맞아요. 노스탤지어는 보통 과거 지향적이고 행동을 유발하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 되잖아요. 근데 전혀 다르게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요. 미래지향적 노스탤지어? 전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생각해보면 되게 따뜻한 감정이고 이렇게 날씨가 매년 변해가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잘 하면 행동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감정인 것 같아요.
영이: 선생님이 쓰신 소설들이 전부 SF 장르잖아요. 수업에서도 SF 좋아하신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요, SF 소설을 좋아하시고 또 쓰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지원: 저는 환상적 장치가 있는 이야기가 재밌다고 생각해요. 근데 '여기서 이거 하나가 바뀐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은 SF로 가잖아요. 그래서 SF를 쓰는 것 같아요. 사실 전 읽는 건 판타지를 진짜 좋아해요.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하게 상상할 힘이 저한테 없어요. 저는 판타지는 그 가상의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그런 게 없어서 SF로만 쓰고 있어요.
야독: 그런가요? 저는 SF, 특히 미국이나 서양권 SF는 그 누구보다 세계관에 진심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원: 그런 면도 있는데, 다른 계열도 있거든요. 저는 이렇게! 하나 바꾸는 걸 좋아해요. 거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라든지 아니면 스페이스 에픽 이런 게 아니라, 정말 이렇게 하나 약간 바꾸는 거 있잖아요.
야독: 일상적인 소재에서 약간 비트는? 우리나라 SF가 그런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지원: 네, 맞아요, 맞아요. 그 과정에서 일상의 기쁨에 대해서 얘기할 틈이 많은 느낌? 저는 그걸 되게 좋아해요.
야독: 선생님은 좋아하는 SF 소설가 있으세요?
지원: SF 소설가는 아니지만, 저는 톨킨을 진짜 좋아해요. 이번에 학부 수업에서도 톨킨을 다뤘는데, <반지의 제왕>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아세요? 나무 베는 놈들이에요! (웃음) 그리고 어떤 곳이 좋다는 걸 묘사할 때, ‘그곳은 나무가 많았다’ 이렇게 말해요. 제일 나쁜 놈들, 마지막에 악당들이 하는 짓 중에서 주인공이 가장 충격받는 게 '우리 집 앞 나무를 베었다'는 거예요. 그런 면이 있는 소설이라서 되게 좋아해요.
야독: 거기서 왜 나무 베는 게 그렇게 나쁜 행위로 묘사되는 거예요?
지원: 톨킨이 개인적인 에세이에서 자기가 어렸을 때 생긴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공장 만든다고 나무 벨 때의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해요. 원래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인 것 같아요.
야독: 자기가 나무랑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꼈던 걸까요?
지원: 나무가 있는 곳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세계관 만들 때도 그게 많이 반영된 것 같고요. 톨킨인지, 톨킨에 대한 글을 쓴 비평가가 한 말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도 그들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trees(내가 나무들의 편에 서겠다.)"라는 말을 했어요. 근데 저는 이게 너무 기억에 남았어요. On the side of the trees. 나무의 편에 서겠다.
야독: 자연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까요?
지원: 나무가 실제로 사람한테 좋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자연 중에 인간한테 좋은 걸 인간이 좋아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 판단이 그렇게 크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나무는 나쁜 점이 거의 없고 좋은 점만 있잖아요.
야독: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원: 맞아요! <Mini Forest Revolution(작은 숲 혁명)>이란 책을 예전에 읽었는데,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 발명한, 되게 짧은 시간 안에 숲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책이에요. 그 책에서는 단순한 나무의 연속과 숲은 다르다고 하는데요, 되게 작은 것도 숲이라고 해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이 안 보이면 숲이라고 한다더라고요. 그렇게 각 지역에서 숲을 만드는데, 외래종을 심지 않아요. 그래서 너무 재밌는 게 옛날 문헌이랑 어르신들 증언 같은 걸 연구해서 여기 원래 있던 나무들, 자생식물들만 심어서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던 숲을 재현하는 거예요.
한 번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나무 심기를 시작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요. 자기가 어릴 때는 나무가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너무 그립다는 거예요. 노스탤지어죠. 그래서 작은 숲을 만들었고, 실제로 생태계를 많이 개선했다고 해요. 일본에서는 학교 안에다 숲을 만들기도 했대요. 그래서 저도 교수가 되면 제일 하고 싶은 게, 한 서너 명 정도의 팀을 가지고 숲을 만드는 거예요. 수업을 하면서 같이 나무를 심어보면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 손이 많이 갈 것 같긴 하지만, 너무너무너무너무 해보고 싶어요. 의외로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들어서 한 몇천만 원 선에서 할 수 있대요. 그러니까 어디 한 군데서만 펀딩 받을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거죠.
야독: 어렸을 때 비슷한 걸 학교에서 해본 것 같긴 해요. 식물 심고 관찰일지 쓰는 거?
지원: 맞아요. 너무 멋진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 죽을 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난 죽기 전에 나무를 심었어!’ 약간 이런 느낌 있잖아요! (웃음) 나는 숲을 남겼다! 제일 멋있어.
이레: 소설 얘기로 돌아오면, 저는 선생님이 쓰신 두 소설의 공통점도 눈에 띄었어요. <엔딩의 발견>과 <올림픽공원 산책지침> 모두 주인공이 어떤 미지의 시공간에서 튀어나온 알 수 없는 존재와 관계를 맺고, 산책을 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특정한 종류의 만남과 산책을 설정하신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지원: 산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산책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산책할 수 있는 날짜가 줄어드는 게 너무 싫었구요.
이레: 산책 없는 세상은 싫어...!
야독: 산책이 어떤 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지원: ‘기분 좋음’을 준다는 거? 그리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고, 에너지를 많이 쓰지도 않고, 하지만 행복도는 높고. 아, 투자 대비 효용이 아주 좋다.
야독: 맞아요. 우울할 때 나가서 공원 산책하고 그러면 환기되는 느낌이 있어요.
지원: 산책할 수 있는 날짜가 점점 제한되면, 인간이 더 불행해질 것 같고 그런 거 있잖아요. 저는 그런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갔을 때 날씨가 항상 좋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해요. 산책이랑 자전거 타는 일이 인생의 행복도를 상향시킨다고 생각해요. 진짜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산책하면 되게 날씨에 민감해져요. 기온이 28도 이렇게 넘어가면 ‘아앗…! 이 이상은 안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 뭔가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산책이라는 행위 자체가 세계에 굉장히 의존하는 행위잖아요. 주변 사람들의 호의와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게 무너지면 안 된다는 감각을 주는 거죠.
야독: 근데 저는 미국에 있었을 때 산책하기가 되게 어려운 환경이라고 느꼈어요.
지원: 저도요. 저 한 번 피츠버그에서 혼자 산책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나가서 걷는데 길에 저밖에 없는 거예요. 자동차랑 저밖에 없는 거죠.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진짜 오래 걸려요. 미국은 완전 자동차 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요.
영이: 진짜 개인 차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지원: 커피점에도 갈 수가 없고 산책하는 곳에 가려고 해도 그곳까지 차를 타고 가야 돼요.
야독: 거기다가 안전하지 않아. 노숙자들도 있고, 혹시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산책은 굉장히 안정된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거네요.
지원: 예전에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되게 유명한 책을 본 적이 있어요. 도시학도 은근히 환경이랑 관련이 많거든요. 거기서도 얘기했던 게 산책에 필요한 엄청나게 많은 조건들. 사회적이면서 환경적인 조건들 있잖아요. 건축적이면서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조건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산책할 수 있다는 건 되게 많은 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 같아요. 미국은 진짜 산책할 수 없어요.
야독: 가장 일상적인 것에 가장 많은 조건이 필요하네요.
지원: 가장 일상적인 게 가장 어려운 거죠.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갖는 공포의 핵심도 그런 것 같아요.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레: 도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소설 끝에 실린 작가 소개에서도 서울과 기후위기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도시로서 서울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지원: 전 서울을 정말 사랑해요. 사실 저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전 태어난 곳에 대한 애착이 되게 강한 사람이라서. (웃음) 일단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인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강이 가운데에 크게 있잖아요. 이것도 너무 좋은 점이고. 강이 그렇게 있지 않으면 자전거 타기가 되게 어려워요. 왜냐면 강 따라서 자전거를 타면 평지에다가 길도 잘 되어 있는 곳에서 달릴 수 있잖아요. 근데 피츠버그 같은 경우는 산지이고 강이 도시의 끝에 있어서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자전거 타기가 진짜 어려웠어요. 저는 미국에 있으면서 서울이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 알게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란 곳인데 내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줄 것인가 이런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이레: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의 ‘작가의 말’에서도 이 소설이 무엇보다 ‘사랑 얘기’라고 써주신 게 떠오르네요.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선생님의 소설들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서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선생님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었는데요, <엔딩의 발견>에서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우리는 그 빛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잊을 수 없는 빛은 하나하나 그리움으로 남게 되며, 어쨌든 최종적으로 마음을 조금 아프게 만들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소설에는 ‘빛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는 구절도 등장해요.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원: 그건 저한테는 ‘산책하려고 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문제가 많더라도 이 도시를 포기하기 싫은 거죠. 사람도 살고 또 환경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에요. 되게 깊이 들어가죠. 물론 그 말을 쓸 때는 약간 에엥~🙄 이런 상태였지만.(웃음)